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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진품 같은 작퉁 파는 안화상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2. 10. 10. 02:43

    도라지를 인삼으로 까마귀 고기를 꿩고기로 말고기를 소고기로 속이는 자도 있고 누룩에 술지게미를 섞고 메주에 밭을 섞는 자도 있다. 소금이 귀한데 간신히 사고 보면 메밀가루를 섞어 넣는다 - 윤기 < 무명자집 > - 조선 후기 서울에는 세군데 큰 시장이 섰다. 운종가(종로2) 배오개(종로 5) 소의문(서소문동)이다. 사람이 하도 많아 어깨와 등이 부딪치고 갓을 똑바로 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난전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 한 사람이 속이면 열배의 이득을 볼 수 있다.

     

    서울내기 이생은 서소문 시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짝퉁 상인에게 속는 어리숙한 시골사람을 비웃으며 자기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다. 하루는 시장을 지나가는데 아이와 상인이 다투고 있었다. 상인은 아이가 가져온 물건을 열푼에 넘기라 하고 아이는 그 돈으로 못 준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상인이 훔친 물건이 아니냐며 의심하자 아이는 상인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달아났다. 이생이 아이가 가진 물건을 보니 진귀한 황대모(바다거북 등껍질)였다. 이생은 아이를 달래어 열두푼에 물건을 넘겨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염소뿔로 만든 가짜였고 아이는 상인의 아들이었다. 이생은 부자의 연극에 감짝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이옥의 시장 사기꾼에 관한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짝퉁 상인의 표적은 귀한 약재와 골동품이었다. 가장 심한 것은 인삼이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인삼 납품은 공인이 담당하게 되었다. 인삼의 수요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화전 개간으로 인삼 산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도저히 가격을 맞출 수 없었던 공인들은 도라지와 더덕을 아교로 붙이거나 인삼 껍데기에 족두리풀 가루를 채워 넣어 가짜 인삼을 만들었다. 이를 조삼이라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납을 넣어 무게를 늘렸다. 쓰나마 번주가 조선 상인에게 사들인 가짜 인삼을 에도 막부에 바쳤다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교문제로 비화한 적도 있다. 영조때 편찬된 법전 속대전에 인삼 위조에 대한 처벌 조항이 실린 정도였다. 위폐 제조에 준하여 엄벌했지만 가짜 인삼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조차 작은 인삼을 풀로 붙여 크게 만든 부삼이었다

     

    비례부동

    골동품도 짝퉁이 많은 품목이었다. 추재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손씨 노인은 골동품 애호가였지만 감식안이 없었다. 상인들이 가져온 가짜 골동품을 비싼 값에 구입하는 일이 허다했다. 많던 재산은 순식간에 거덜나고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웃 사람이 불쌍히 여겨 밥을 갖다주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남의 도움을 필요없소. 짝퉁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있다. 1669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민정중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을 구해왔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비례부동 네 글자였다. 송시열은 어필을 받아 보고 감격하여 화양동 바위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이 네 글자가 의종의 어필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가면 짝퉁 상인들이 몰려와 온갖 가짜 물건을 팔았으니 이 역시 가짜였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비례부동 네 자를 새긴 자리에는 만동묘가 들어섰다. 송시열의 문인들은 이곳에서 임진왜란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만동묘는 숭명배청의 이념을 상징하는 노론의 성지가 되었다.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숭명배청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 왕조는 멸망할 때까지 이를 견지했다. 모두 의종의 어필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짝퉁 한점이 조선 정치사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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