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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 착호갑사는 어떻게 조직되어 활동했나
    아들을 위한 인문학/조선시대 직업들 2021. 12. 13. 04:58

    갑사 박타내가 창을 가지고 다가가 잘못 찌른 까닭에 호랑이에게 물려 거의 죽게 되었다. 도승지 신면에게 명하여 극진히 약으로 구호하도록 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튿날 죽었다 <세조실록 12(1466) >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원나라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인 착호인을 고려에 보내 호랑이를 사냥했다. 호랑이 가죽을 얻을 목적이었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사신이므로 이들을 착호사라고도 불렀다. <고려사>에 따르면 1277년 착호사 투게와 휘하 착호인 열일곱 명이 고려에서 사냥했다. 호랑이 관련 이야기도 많아 육당 최남선 호랑이 이야기를 모아 <아라비안 나이트>를 만들 곳은 우리뿐이라며 우리나라를 호담국이라고 했다

     

    조선은 원활한 목재 확보를 위해 소나무 벌목을 금지하는 금산과 봉산제도를 시행했다. 금산령이 공포되면 입산 자체를 불허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이 발길이 끊긴 숲은 동물 천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호랑이가 살았다. 고종 때까지도 서울 인근에서 호랑이가 출몰했다. 1868년 북악산 봉우리에서 세 마리, 수마동에서 두 마리를 잡았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호랑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호정문>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호환을 묘사했다. 이글의 내용처럼 행상이 지름길로, 나무꾼이 나무하고 꼴을 베다가,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농부가 밭을 갈고 김을 매다가 호랑이를 만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호환이 외적의 침공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걱정했다

     

    조선 조정은 호환을 막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정책을 시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착호갑사와 착호인이었다. 착호갑사는 서울, 착호인은 지방에서 호환을 방비했다. 군인이 활과 창을 들고 외적과 싸웠다면 착호갑사는 호랑이와 싸웠다. 착호갑사는 말 그대로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였다

     

    착호갑사는 태종 1416년 임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호랑이 사냥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부대가 되었다. 세종 1421년에는 40, 세조때는 2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성종때 완성한 법전 <경국대전>의 수를 440명으로 명시했다

     

    착호갑사는 담력이 세고 무예가 출중한 군인으로 가려 뽑았다. 착호갑사가 되려면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발 이상 명중시켜야 했고 두손에 각각 30킬로그램을 들고 100보 이상을 한번에 가야 했다

     

    착호갑사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활과 창으로 무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부대는 휴대가 쉬운 각궁을 썼으나 착호갑사는 크고 무거운 목궁이나 쇠뇌를 썼다는 점이다. 쇠뇌와 목궁은 무겁고 크지만 살상력이 뛰어나다. 특히 목궁은 대전을 쏠 수 있어 호랑이 같은 덩치 큰 맹수를 상대하기 알맞다. 대전은 깃이 넓고 촉이 큰 화살이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추적해 근거리에서 쇠뇌나 목궁으로 저격했다

     

    착호갑사는 다년간 훈련을 통해 호흡을 맞춘 분대 단위로 활동했다.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산으로 들어가 며칠이고 호랑이의 자취를 뒤쫓았다. 덫을 놓고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매복하거나 발자국을 쫓는 게 착호갑사의 일상이었다

     

    무사히 사냥을 마치면 공격한 순서와 호랑이 크기에 따라 포상했다. 호랑이 크기는 대중소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호랑이는 포악학 덩치가 커 단번에 죽이기 어려웠다. 이를 고려해 세 번째 명중시킨 사람까지 포상했다. 물론 제일 먼저 명중시킨 사람이 가장 큰 상을 받았다. 또 호랑이에게 치명상을 입힌 착호갑사는 호랑이 가죽을 포상으로 받았다

     

    호랑이 가죽은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인조때 호랑이 가죽 한 장이 베 50필에 팔렸다. 연산군 때는 80, 60년 뒤인 명종때는 400필로 가격이 폭등했다. 1744년 속대전에서 면포 한필 가격을 두냥으로 책정했다 대짜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보통 100냥 정도 였다. 서울의 초가집 한 채와 맞먹는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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