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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콜로세움과 바티칸시, 베네치아 등에 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외여행 2023. 3. 25. 03:49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으로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이지만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살레에서 유래한 콜레세움으로 더 많이 불린다. 콜레세움은 기원전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짓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인 타원형으로 4층 전체 수용 인원이 5만명이나 되는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이다. 80개의 아치문이 있어서 수만명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거나 빠져나갈 수 있다. 로마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검투사들끼리의 대결이나 맹수들의 혈투 등 피비린내 나는 경기가 매일 벌어졌다. 그후 300년 이상 처참한 사투가 되풀이 되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 뒤 콜레세움은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고 큰 건물이나 교회를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훼손되었다. 18세기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교의 수난의 현장으로 지정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편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 경기장들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 구조물이다. 콜로세움은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고 후에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현재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들처럼 콜로세움도 중앙 무대 밑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로가 있다.

     

    관중석은 투기장을 빙 둘러 동심원상으로 낸 통로에 의해 각 부분으로 나뉘고 수많은 통로에 의해 관중석 등급이 구분된다 ( 황제와 수행원들의 특별석 / 베스타 신을 모시는 여사제, 콘술 : 집정관, 프라이토르 : 법무관, 외국의 대사, 사제와 저명한 손님들이 앉는 자리 / 원로원과 에퀴테스 계층의 자리 / 귀족석 / 평민석 / 여자들을 위한 칸막이석 ) 콜로세움은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2천년 전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을 세우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사에 동원되었을까 ? 또한 고대 로마인들은 그 옛날에 이 무거운 돌을 어떻게 들어 올렸을까 ? 이것이 콜로세움의 미스터리이다. 타원형의 4층 건물인 콜로세움은 좌석과 중심에 있는 무대의 각도가 37도이다. 이 각도는 박진감이 있게 즐길 수 있는데 좌석과 중심에 있는 무대가 37도를 이루는 경기장은 지금의 건축기술로도 짓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콜로세움이 불가사의한 이유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00년경에 로마제국을 건설하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유럽,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중동까지 지배하는 세계 최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탈리아는 천년 역사를 지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역 감정이 무척 심하다. 다혈질의 그들은 성격 그대로 남과 북의 나뉘어져 서로 반목한다. 일찍이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소득이 높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반면 농업이 주산업인 남부는 소득이 낮으나 농업으로 인하여 가족들의 유대가 강한 편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또한 통일 과정에서 북부 사람들이 나폴리 왕국 사람들과 남부 사람들을 많이 살상했기에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다

     

    로마에 위치하면서도 이탈리아에 속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시, 그러나 바티칸 시는 독립된 정부와 군대를 가지고 있고 우표와 화폐를 발행하는 어엿한 독립국가다. 바티칸 시에는 전 세계 카톨릭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이 살고 있다. 스위스 용병들이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옷을 입고 지키고 있다. 바티칸 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고 광장은 좌우 폭이 240m로 약 30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정도로 넓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에서 옮겨온 높이 25.5m 무게 350톤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다.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태양신 레에게 받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사실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한편 성 베드로 대성당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묻혀 있던 공동묘지 자리에 세워져 있던 작은 성당을 1500년경에 교황의 명으로 증축하여 지은 것이다. 백여년에 걸친 증 개축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콜로세움의 많은 부분이 건축용 자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비스듬히 서 있는 피사의 탑은 높이가 약 58m이고 8층 대형 원형 건물은 가까이 보면 크다. 1174년에 착공되어 10m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 앉아 탑이 기울었으나 피사의 사탑을 그 상태로 그대로 건설했다. 현재 기울기는 약 5도지만 지금도 계속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구조라고 한다. 사탑은 원형 외벽과 원형 내벽의 두겹으로 만들어져 있다. 두 겹 사이에는 계단이 있어서 계단이 두벽을 지탱해 줌과 동시에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대리석 계단의 마모 상태는 수백년 세월을 견디었고 처음 들어갈 때는 두명이 서로 비켜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상부 꼭대기에 오르면 한명이 거의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위로 오를수록 약간 좁아지게 탑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내벽의 중앙은 텅 빈 공간으로 되어 있어서 종을 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피사의 사탑은 중앙의 텅 빈 공간, 외벽과 내벽 사이의 통로 계단으로 인한 상호 보강구조, 위로 오를수록 좁게 설계된 탑신 등의 구조는 수백년 동안 지탱하고 있는 핵심 열쇠이다. 294개의 계단을 이루며 약 800년전에 갈릴레이는 이곳에서 새털과 쇠공을 떨어트리며 낙하실험을 하였다

     

    산마르코 광장

    기독교 문명과 동방의 비잔틴 문화를 융합해 독특한 문화로 꽃피운 베네치아는 백여개의 운하와 4백여개의 다리가 거미줄처럼 도시 전체에 퍼져 있다. 베네치아는 서로마제국의 몰락 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어닥치는 이민족을 피해 해안 지대로 도망친 사람들이 물을 방패 삼아 이룩한 도시이다. 그후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약 천년 간 독립을 유지하면서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지점으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97년 나폴레옹의 점령으로 베네치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이 극찬한 산마르코 대성당과 광장, 두칼레 궁전, 리알토 선착장 등이 있다. 베네치아는 18세기의 모험가이며 호색가인 카사노바가 있고 탄식의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여기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해서 나의 탈출기를 쓰기도 했다. 또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이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출항해서 중국 여행길을 올랐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상징인 곤돌라는 비대칭한 배이다. 앞이 높게 휘어져 올라가 있는 뱃머리와 선미가 특징이고 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뱃머리가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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