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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심 속 또 다른 세계, 이태원과 대림동을 가보면
    아들을 위한 인문학/국내여행 2023. 1. 28. 02:16

    이태원의 다양한 정체성은 길에서 드러난다. 다국적, 다문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개방성과 소수자들의 공유공간은 이태원을 규정하는 단어들이다. 이태원의 윗동네라 불리는 소방서 뒤편의 우사단로를 부면 이태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골목 후커 힐(기지촌)은 용산에 주둔했던 미국부대 군인들이나 외국인을 상대로 성행한 클럽이나 펍 등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이다. 이태원하면 최근에는 외국인들을 통해 다양한 문화가 유입된 공간,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맛집이 즐비한 거리, 화려한 카페와 클럽들, 문화예술인들을 통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장소 들이 떠올린다. 그러나 화려한 거리 이면에는 과거 미군기지를 상대로 유흥가들이 빼곡했던 아픔의 길도 있다. 이곳은 여성의 성을 이용해 외화를 벌어들였던 역사의 한 장소이자 미국문화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 펼쳐졌던 곳이었다. 8군 무대는 대중가수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고 패티김, 신중현, 조용필, 조영남 등의 유명한 가수들도 미 8군 무대 출신이다. 8군 무대에 서지 못한 수많은 예술가들도 자신의 끼를 이태원 소방서 뒷골목 펍에서 발산하기도 했다. 어쩌면 언더그라운드들의 상징적 장소가 된 신촌이나 홍대 이전에 이태원이 그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이태원의 장소는 한국 사회가 기준으로 세워둔 틀에서 벗어나 일종의 해방감을 표출하는 곳이다

     

    이태원은 미군부대를 통해 미국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이자 새로운 형태로 확산되어가는 장이었다. 또한 성소수자의 해방기구 같은 공간이었는데 두 번째 골목에 들어서면 게이 힐이라 부르는 우사단로 12길로 마주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성소수자들을 위한 장소가 꾸준히 만들어졌고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자유로움과 이질적 문화에 대한 높은 수용도를 바탕으로 성소수자들의 아지트가 형성되었다. 또한 미국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물건들이 우리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오르막 언덕길에서 자리 잡은 도깨비시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를 겪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복잡한 골목길에 낮이면 볼 수 없던 시장이 해가 지면 열렸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장터였다. 이 오래 낙후된 길이 문화예술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늘날 이태원에서 다양한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게 된 것은 미국기지의 영향이 크다. 1960년대에는 용산기지가 가까워 유사시 신속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한 외국대사관이 60여곳이며 대사관로가 붙여졌다. 한편 경리단길이 있는 이태원 2동은 남산과 군부대 등 고립된 지리적 입지와 고도 제한의 영향으로 저층 단독 주거 밀집지역이 형성되었다. 주변 다른 지역보다 임대료가 저렴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의 생활공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걷고 싶은 골목길, 매력적인 공간의 원조가 된 것이다. 비좁은 골목길, 반듯하게 정돈되지 않았기에 더욱 이색적인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이태원은 다양한 종교적 경관을 볼 수 있다. 1976년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 지어질 당시에는 국내에 이슬람 성도들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를 건축한 이유는 당시 중동 건설의 열기로 중동의 친화적 교류를 위해서다. 무슬림 식문화를 반영한 식당도 밀집하였고 특히 할랄인증이 중요했다. 케밥, 양고기, 양꼬치 등의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고 아랍어의 서적도 접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성원을 들어서려면 맨살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출입할 수 없고 남성과 여성 예배실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들은 기도와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간단한 세정의식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금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해야 한다. 한편 이슬람 성원은 꿉바라는 돔 형태의 지붕과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첨탑으로 이루어졌다. 정면에 녹색글자는 아랍어로 알라만이 가장 위대하다라고 써있다. 성전 내부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펼쳐지고 정중앙의 화려한 벽장식은 메카의 방향을 나타낸다. 사원 옆에는 술탄 마드라사라는 이름의 무슬림 학교도 있다. 2018년 기준 외국인은 27.5만명이었고 용산구에만 1.5만명이 거주하였다. 동남아시아 이슬람교가 대부분이었고 사우디, 터키, 이집트가 거주 하였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금하였다.. 그러나 용산기지 미국 감축과 미군기지 이전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미국 인구는 감소되고 그 대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유입되었다. 남산을 향하는 이태원 위쪽 부근에는 고급 단독주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이 밀집하고 있다. 한강으로 내려가는 아래쪽 부근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나이지라아의 보따리가 장사가 많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출신 국적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태원의 원은 이곳이 교통과 관련된 취락지였다. 한양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로 출장을 가는 관리들이나 먼길을 떠나는 여행자들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한양의 통하는 주요 관문이자, 한강의 물길이 닿아 여러 지역의 물자들이 오고 갔던 항구의 기능도 담당하던 곳이었다. 이에 이태원은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주둔지였고 광복 이후 미군의 주둔기지가 된 것이다. 조선 효종 때 배가 많아서 (배나무 이) (클태) 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때에는 왜군의 혼혈아 등을 집단으로 보육하였고 조선인에 항복하여 귀화한 일본인의 거주지가 모여 있다 하여 異他人이 사는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異胎院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지역 정체성이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란과 개항기, 미군의 신탁통치를 통해 우리와 다른 이들이 대대로 터를 잡았던 곳이기 떄문이다.. 임오군란때에는 청나라 부대의 주둔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 조선사령부의 주둔지였고 그터가 광복 이후의 미군기지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태원 터 옆 남산 아래 자락엔 지금의 해방촌이 조성되어 있다. 남산 아래 첫 마을인 이곳은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이 자리잡았다. 특히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신자들이 모였다. 해방촌 상권은 1960-70년대 스웨터 가내수공업이 각광받았다. 인근 남대문 시장으로 납품한 노동중심 가내 수공업이었으나 중국산 의류에 밀려 해방촌 니트산업은 쇠락하게 되었다

     

    2017년 말 체류 외국인의 수가 우리나라 인구 대비 4%(220만명)를 넘었다. 체류 외국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가 넘으면 다문화 사회 진입단계로 5%를 넘으면 성숙단계로 구분한다. 다문화 학생 수도 그 당시 10만명이었다. 우리나라는 2006년 다문화 원년을 선언하고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어 2009년 경기도 안산을 다문화 특구로 지정했다. 안산은 인구 분산을 위해 만든 계획적 신도시이자 2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공업도시이다 1980년대 반월공단 시화공단 등 주변 공업지대의 배후 주거지가 바로 원곡동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이곳에 자신의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 현재 안산시 인구의 10%이상(8만명)을 차지하며 세계 각국의 음식문화와 이색적인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거제는 조선업을 바탕으로 외국인 유입이 많아진 지역이다. 해양플랜트 산업을 위해 유럽과 호주에서 온 엔지니어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서울 반포동에는 프랑스인 밀집 지역인 서래마을이 1985년 프랑스 대사관학교가 용산의 한남동에서 이전하며 형성되었다. 몽마르트 언덕의 이름을 따서 몽마르트 공원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동부이촌동은 리틀도쿄로 불리고 혜화동에는 일요일마다 필리핀 시장이 열렸다. 이들은 스페인 지배로 카톨릭 신자가 대부분이고 1995년 혜화동 성당에 필리핀 신부가 부임해 모국어로 미사를 진행했다

     

    외국인 200만 시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외국인은 중국인이며 50%를 차지한다 대림역에서 내려 거리를 걷다 보면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의아할 정도로 간판과 안내문도 중국어이고 시장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에서도 중국어가 많이 들린다. 인천의 차이나타운과는 특성이 다르다. 거기는 인천의 관광지특구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 등이 개발되다 보니 그들의 삶의 터전 같은 느낌은 들지 않다. 그러나 대림동은 중국인들의 정체성이 숨쉬고 있는 듯하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행을 결심했다. 이는 1990년대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해외 이주한 공장들, 3D업종 기피 현상으로 빠져나간 노동자들의 삶의 공간에 조선족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많은 구로와 가깝고 지하철 2,7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고 주거비가 저렴하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쳐 2002년 이후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초기 정착된 조선족 거리는 가리봉동에서 출발했다. 최근에는 가리봉동의 재개발로 인해 바로 옆 대림동으로 옮겨가면서 대림동 시장이 그들의 중심 커뮤니티가 되었다. 한편 영일과 대동초등학교는 2016년 문화소통 세계 시민 양성연구학교로 지정되었다. 한중 이중 언어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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