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위한 인문학/경제

이라크, 가장 뜨거운 돈의 전쟁터가 되다

ybea12 2025. 6. 19. 03:00

< 석유 가격 문제로 시작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끝난 1988, 이라크의 국가 경제는 파탄 직전에 몰려 있었다. 더구나 이라크에서는 젊은 남성 100만명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전쟁이 끝났을 때 그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이라크의 주된 재원은 석유 수입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파이프라인은 토막 났고 재건도 원활히 진행되지 못했다. 이라크는 아랍국가들로부터 400억 달러를 빚졌기 때문에 석유 수출로 절반 이상을 부채 상환에 써야 했다. 게다가 당시 석유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랍에서는 OPEC이 할당한 양 이상으로 석유를 수출하는 국가들이 속출했는데 이중에 쿠웨이트가 있었다. 그때까지 아랍 산유국들 대부분은 원유를 그대로 수출했다. 석유 정제 등의 작업은 구미 각국이 자국에서 진행했다. 그런데 당시 쿠웨이트는 유럽 각지에 자비를 들여 석유 정제소를 건설했다. 원유를 수출하는 것이 아닌 공업 제품을 수출하게 되어 더 많은 이윤이 발생하게 되어 쿠웨이트의 재정은 석유 가격 하락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게 되어서 OPEC협정에서 정한 기준을 넘어서는 석유를 수출했다. 이라크는 OPEC회의에서 생산 할당량을 준수하고 가격을 인상할 것을 주장했으나 쿠웨이트는 저가격 증산 노선을 유지했다. 한편 쿠웨이트는 이라크에 전비로 140억달러나 빌려주었으니 은인으로 여길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라크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아랍국가들을 대표하여 전쟁을 한 것이었으므로 쿠웨이트가 이라크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9907월 이라크는 쿠웨이트와의 국경에 병력 10만명을 집결시켰다. 이에 깜짝 놀란 쿠웨이트는 석유 가격 인상에 동의했다. 이에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빌렸던 140억달러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덧붙여 상당히 예전 일이었던 영토문제를 꺼내들고는 그 대가로 100억달러를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라크의 요구는 거세져 급기야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082일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침공을 개시했다. 이라크군은 고작 8시간만에 쿠웨이트 전역을 점령했으며 일주일 후에는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 병합을 선언했다

< 이라크의 경제파트너인 미국은 왜 등을 돌리게 되었나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서구 및 아랍국가들이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제로 대외자산은 모조리 동결되었다. 한편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 침공하기 직전에 이라크 주재하던 미국 대사에게 쿠웨이트와의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구했다. 미국 대사는 미국은 아랍국가들 사이의 분쟁에 참견하지 않겠다라고 확약했다. 또한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미국의 새 대통령 부시는 이라크와의 관계가 친밀하기를 바란다라는 발언을 수차례 했다. 그러한 까닭에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라크의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었다. 이란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때까지 이라크의 주된 무역 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일본 등의 기업들이 철수했고 그 자리에 미국이 들어왔다. 전쟁이 끝났을 때만 해도 이라크와 미국은 밀월 상태에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당시 이라크는 에너지 전략상 중요한 파트너였다. 따라서 쿠르드인 화학무기 사용이나 소수민족 박해에 대한 인도적인 문제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 미국이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우선 냉전 이후 거대한 군비가 남아 있어 이에 대한 처리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정의의 철퇴를 내리고 쿠웨이트를 구한다면 미국은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석유 사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사우디 등지에 미군을 주둔시킨다면 아랍 전체를 엄중히 감시하고 감독할 수도 있다. 소련이 붕괴된 상태이라서 미국 대사의 확약을 파기하고 이라크의 전쟁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이슬람의 메카의 성지가 있는 사우디가 주둔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띠고 싶어서 사우디가 먼저 이라크의 침공을 중지시켜달라 우리의 기지를 사용해도 좋으니 이라크를 공격해달라라는 말을 꺼내게 하기 위해 음양으로 압력을 가했다. 게다가 이라크는 쿠웨이트뿐 아니라 사우디 침공해올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사우디는 결국 미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사우디를 거점으로 삼아 이라크를 향한 지상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이 걸프전만큼 경제적으로 효율이 좋은 전쟁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냉전 중에 갖추어진 무기를 그대로 쓰면되고 게다가 군비는 일본과 같은 동맹군이 지출하게끔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아랍지역에서의 거대한 석유 이권까지 확보할 수 있다. 걸프전을 통해 미국은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 후세인 정권을 살려둔 미국의 속셈 >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자 국제사회는 새로운 제재를 결단한다. 군사적 제재가 그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완력으로 몰아내기 계획을 세웠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에 19911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라고 경고했으나 이라크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며 이 경고를 무시했다. 철수 시한을 이틀 넘긴 117일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국적군은 최신 폭격기인 B-52 및 순항미사일 토마호크 같은 최첨단 병기들을 동원하여 공중에서 폭격을 가했고 이라크의 군사시설을 연이어 파괴했다. 1개월가량 공중폭격을 이어간 후 다국적군은 쿠웨이트에 상륙하여 지상전에 돌입했다. 이라크군은 결국 227일 쿠웨이트에서 철수했다. 이라크는 전쟁에서 지고 쿠웨이트에서 철수했지만 이라크군 자체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군을 철저히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걸프전이 종결되던 때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인과 이슬람교 시아파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 이라크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쿠르드인과 시아파 등도 반쯤은 다국적군과 미국의 지원에 의지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중동 전략과 연관이 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까지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을 견제했다. 이란을 암적 존재로 미국은 인식하고 있었다. 섣불리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 시아파가 이라크에 정권을 세운다면 또 하나의 이란이 생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은 그러한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즉 이 대목에서 이라크에 생색을 냄으로써 앞으로도 미국의 충실한 개로 지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후세인 대통령은 그 후 반미 색채를 명확히 드러냈다

달러 패권 도전
중동 왕족 보호 명분

 

< 미국 경제의 역린을 건드린 후 후세인 >

걸프전이 끝나고 12년이 지난 후 2003년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러시아 독일과 중국이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미국은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라며 전쟁을 시작한다. 결국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전쟁을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쟁의 명분으로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관계를 거론했는데 이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알카에다의 결성 목적 중 하나가 후세인 정권의 쿠웨이트 침공에 강하게 반대하는 동시에 미국에 기대지 말고 아랍 의용군으로 아랍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경제적 이유에서라고 보고 있다. 200011월 후세인 대통령은 석유 거래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변경했다. 이는 미국에 크나큰 타격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석유거래는 달러로 치르는 것이 암묵적인 룰로 자리잡고 있었다. 중동의 왕국이 민주화 없이도 살아남았던 데는 미국과의 밀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석유거래를 달러로 하는 대신 중동의 국방을 책임져 주는 것이다. 후세인 대통령은 이 암묵적인 룰을 깨고 유로 거래를 시작해 미국의 꼬리를 밟았던 것이다. 이 석유 거래를 유로로 치른 곳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석유회사였다. 미국의 달러라는 존재는 대단히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다. 미국 경제는 거액의 무역적자를 끌어안고 있으므로 파탄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달러 지폐를 찍어내기만 한다면 세계각국이 사들인다. 그렇게 해서 미국 경제는 붕괴를 면해왔다. 따라서 미국은 달러가 지닌 기축통화의 지위를 절대로 지켜야만 했다. 이라크의 유로거래는 그와 같은 미국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유로로 거래하는 산유국이 계속해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자 곧바로 이라크의 석유 거래 수단을 달러로 되돌렸다. 전쟁이란 대개 이권이 얽히기 마련이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대가도 컸다. 2008년을 기준으로 이라크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4천명을 넘어섰다 오바마 정부는 이라크 미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2011년 치안부대까지 포함하여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한편 후세인의 잔당들은 끝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는데 현재 세계 최대의 테러 조직이라 간주되는 IS

< 후세인 잔당이 만든 IS의 대두 >

2014년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 지역에 갑자기 IS가 출현했다. IS는 독립국가임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했으나 이를 승인한 국가는 아직 없다. 이들은 수도를 시리아의 락까에 두고 이라크 제 2의 도시인 모술도 장악했다. 서구 강대국의 공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훗카이도와 비슷한 면적의 땅을 차지하고 1천만명 가까이 지배하에 두고 있다고 한다. IS는 탄탄한 수입원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유전 몇 곳을 장악하여 석유를 밀수출하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군사비를 충당하는 것이다. IS는 국가 체제를 이룩했다. 중앙부처도 두고 있으며 컴퓨터 기술자나 프로그래머도 전문가 등도 있다. IS내에는 무기 공장, 상점, 시장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학교, 병원, 은행 등까지 갖춘 지역이 있다. 수도 전기 같은 인프라도 상당히 정비되어 있다고 한다. IS는 후세인 대통령 시절의 이라크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집단이 만든 조직이다. IS의 지도자 중에는 후세인 시절 이라크 간부가 다수 포진되어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후 이라크에서는 전 후세인 정권의 요인들 다수가 추방당하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후세인 정권의 간부들과 수니파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것이 IS인 것이다. IS는 세계 각지의 테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 IS를 탄생하게 한 것은 이라크 전쟁이며 미국을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결과 적으로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놓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