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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정치개혁, 조광조의 도학정치, 대원군의 개혁정책의 의미는아들을 위한 인문학/한국사 2025. 11. 13. 01:56



정치개혁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사회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성패는 곧 그 사회의 진퇴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지난날 정치개혁의 자취를 살핀다는 것은 그 사회의 흥망성쇠를 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역사에 등장한 정치개혁이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았다. 정치개혁의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복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복병들은 시대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 충선왕과 공민왕의 정치개혁 >
고려는 관료들에게 등급에 따라 일정한 면적의 토지와 산림을 내려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하였다. 이런 제도를 전시과라 불렀다. 그러나 이자겸 집권기와 무신 집권기로 접어들자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고 대몽집권기와 원의 간섭기를 거치는 동안 아주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는 오래된 권문세족과 신흥 권세가들이 정치의 혼란을 틈타 토지와 산림을 독식한 결과 대토지겸병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원나라와 인연있는 자들은 신분과 직위에 관계없이 고위관직을 차지했다. 인사관행은 뒤죽박죽이었고 관리는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는 사이 왕실과는 깊은 반목과 갈등이 생겼다. 위기의식 속에 충선왕이 즉위하자 정치개혁을 착수하였다. 부당한 인사권을 행사한 정방을 대신할 사림원을 설치하여 왕명의 출납과 관리등용, 제도개선을 하게 하였다. 참신한 사림원 4학사들은 관제개혁에 들어가 불필요한 인원을 대폭 줄였다. 원나라의 중간개입과 권세가의 완강한 저항으로 3개월만에 실패했다. 충선왕은 강제 퇴위되었다.


공민왕대에 이르자 국내외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국제적으로 원나라의 힘이 약화되고 몽고 초원으로 쫓겨가기 일보직전이었고, 국내적으로는 신진관료들의 세력이 제법 커져 있었다. 공민왕은 한나라를 다시 새롭게 한다는 뜻인 일국갱시라는 정치목표를 내걸고 야심적인 정치개혁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몽고풍습인 변발과 호복을 폐지하였고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변정도감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또 다시 권세가들의 소굴이 된 정방을혁파한다는 과감한 조치들을 내걸었다. 개혁사정은 원 왕실과 결탁한 기철 형제와 친원파인 조일신을 차례로 숙청했다. 여세로 원의 정치간섭기관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고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동북면과 서북면의 구영토를 되찾았다. 이때 동북면 지방의 천호였던 이자춘이 고려에 내응해서 큰 공을 세웠는데 덕분에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공민원은 원나라 연호인 지정을 거부하고 원의 지시 아래 격하되었던 관제를 옛날식으로 부활시켰다. 한편 원명 교체기에 백련교를 업고 급성장한 홍건적이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도망치다가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범하였다. 2차 침입에는 개경이 함락되었다. 홍건적 격퇴 과정에서 무장세력의 진출하고 친원세력은 이를 기화로 공민왕을 살해하려는 흥왕사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공민왕은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권문세족과 연결되지 않은 참신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신돈이었다. 그에게 정치개혁의 대권을 주었고 신돈은 먼저 최고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신구 세족들을 내쫓았다. 또 그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신구 세족들은 강한 저항으로 공민왕 20년에 처형당하고 친원파 세족들은 신돈이 죽은 뒤 3년 후에 공민왕도 살해했다.



< 사림파의 등장과 조광조의 도학정치 >
조선이 건국되고 1백여 년이 지난 즈음 이런저런 공신의 대열에 올라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훈구 척신들은 서로 고위관직을 돌려가며 하거나 온갖 특권을 누리며 부귀영화에 취해 있었다. 이러한 훈구파들에 대한 비판 견제 세력이 등장하였으니 곧 사림파였다. 이들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통 성리학파로서 세종의 인재등용책으로 중앙에 그 발판을 마련했다가 성종대로 오면서 차츰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유교의 이상정치를 주장하였다. 사림파들의 세계관으로 볼 때 훈구파들의 무정견과 현실영합적인 태도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소인배들의 것이었고 또한 훈구파들의 정치 경제적 입지가 넓을수록 사림파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만큼 사림과 훈구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싸움이었다. 첫 번째 대결은 연산군 4년(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에서는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사초를 문제삼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어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가 발단이 된 갑자사화(1504년)에서도 사림파는 크게 당하여 두 번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사림파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사림의 일각에서는 연산군 폭정타도를 외치는 움직임이 있었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등극했다. 중종반정이라고 하였다. 중종은 전대에 화를 입은 자들을 복권하고 유교를 진작하고 성리학자들을 등용했다. 그 중에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이었다.


조광조는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를 부르짖었다. 이는 왕이나 관리들이 도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학정치라고도 한다. 조광조는 자신의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현량과를 설치하여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많은 신진사림을 중앙정계로 진출시켰다.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정부패에 물든 훈구 척신들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그들의 공훈을 깎아내리고 광활한 토지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향촌사회에 향약을 보급하는 운동에도 주력하였다. 그러나 기회만 엿보던 훈구 척신들은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을 하여 조광조와 그의 신진사림을 실각시키고 말았으니 중종 14년(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서였다. 이렇게 훈구 척신이 완경히 버티고 있는 한 조선에서 만족스런 정치개혁이 수행되기란 불가능했다


<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개혁정치 >
19세기에 조선의 정치는 안동 김씨들에 의한 세도정치였다.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는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고 관료사회는 깊이 썩어들어가 목좋은 지방 수령이 되길 원했다. 곡창지대인 삼남지방으로 이곳은 수탈이 심해지고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는 듯했다 1862년 농민들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70여개 군현 이상에서 일어났으며 이들은 이 봉기를 통해 세제개혁과 정치개혁을 외쳤다. 때마침 철종이 죽자 세도정권 안동 김씨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하응의 어린 아들을 왕에 추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농민봉기를 의식하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해 개혁을 서둘렀다. 사색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법전을 편수 완비하여 정치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그 동안 지방 유생, 토호들의 소굴로 변해 서민들을 등쳐온 서원을 전면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삼정의 문란에서 오는 폐단을 수습하여 국가의 재정원천을 확보하였다. 다음으로 서구자본주의 열강과의 접촉을 금하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의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일시적으로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거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체제 재생산용의 차원에 머물렀고 수구세력과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수구세력이 반격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경북궁 재건축으로 돈을 남발하고 경제를 위축시키자 이를 기화로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며 대원군의 퇴출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은 민비를 중심으로 한 척족세력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이들은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뒤집고 유행 토호들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약탈을 계속하였다. 이어 민씨들은 대책 없이 문호를 개방하고 말았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름 아래 쇄국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1876년에 운양호 사건를 빌미로 손쉽게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열강들의 통상압력에 굴복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한편 고부군수 조병갑의 극심한 탐학은 농민들의 행동에 도화선이 되었다. 이는 개항 후의 정국을 예의주시하며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던 전봉준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의 가세함으로써 마침내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대원군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여 수구세력이 다시 발호한 결과 일어난 농민저항이었고, 또한 수구세력과 결탁한 민씨 척족이 정치적 비전 없이 과거의 관행을 되풀이한 결과 피할 수 없었던 개혁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은 위태로운 권좌를 놓치지 않으려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였으나 일본군은 오히려 궁궐을 침입하여 민씨 척족들을 몰아내고 친일 개화인사들을 앞세워 친일 개화파 정권을 출범시켰다. 친일 개화파들은 농민군이 실시한 폐정개혁을 본받아 갑오개혁을 수행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억누르는 외세와 야합한 타율적 개혁이었다. 외세의 조종을 받는 정치세력은 지지를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사회를 어지럽게 만든다는 교훈을 남기며, 결국 국권을 일제에 넘겨주는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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